가와에 유키노리가 말하는 쿠푸왕의 대피라미드: 무엇을 위해, 누가, 어떻게 지었는가
VAIENCE バイエンス원문 언어 日本語
약 4500년 전 기자에 세워진 쿠푸왕의 대피라미드를 고대 이집트인은 어떻게 쌓았을까. 건설에 참여한 사람들은 정말 노예였을까. 내부에 미지의 공간이 있을까. VAIENCE의 '바이엔스 토크'는 이런 질문들을 기자의 피라미드 타운 발굴과 피라미드 3D 측량에 참여해 온 이집트 고고학자 가와에 유키노리에게 던졌다. 가와에는 발굴 자료와 실험 고고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답한다. 그러면서 피라미드를 볼 때는 돌의 크기나 신비로움보다 그 배후에 있는 인간의 조직과 국가의 구조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얗게 빛나던 본래의 모습과 단계적으로 변한 기자의 경관
프로그램의 내레이션은 피라미드의 기원부터 설명한다. 약 4600년 전, 왕의 무덤은 햇볕에 말린 벽돌로 만든 마스타바에서 거대한 석조 계단식 피라미드로 바뀌었고, 이후 건축 기술이 급속히 발전해 약 4500년 전 기자에서 쿠푸왕의 대피라미드가 탄생했다.
가와에에 따르면 지금 보이는 모습은 건조 당시와 크게 다르다. 현재의 대피라미드는 석회암이 드러나 있지만, 원래는 질 좋은 새하얀 화장석이 표면을 덮고 있었다. 화장석은 후대에 벗겨져 재사용되고 말았다. 그래서 본래는 햇빛을 반사하는 아름다운 사각뿔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꼭대기에는 고대에 벤벤석이라 불린 캡스톤이 있었고, 아마 금과 은의 합금인 엘렉트럼이 박혀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나일강의 범람으로 피라미드 기슭 가까이까지 물이 들어왔다고 내레이션은 전한다.
가와에는 3대 피라미드가 처음부터 세 개 나란히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도 강조한다. 쿠푸 시대의 기자에는 대피라미드 한 기만 있었다. 이어서 카프레가 두 번째 피라미드를 세우자 두 기의 경관이 되었고, 쿠푸의 손자인 멘카우레가 세 번째 피라미드를 지으면서 비로소 '3대 피라미드'가 되었다. 한 기, 두 기, 세 기로 시대마다 다른 풍경이 있었다는 것이 가와에의 설명이다. 세 기 모두 원래는 화장석으로 빛나고 있었다고 한다.
비가 내리고 사바나에 가까웠던 4500년 전의 기자
당시의 자연환경도 지금의 메마른 대지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고 가와에는 말한다. 4500년 전의 기자는 지금보다 비가 많았다. 그 근거로 가와에가 드는 것은 자신이 발굴하던 피라미드 타운, 즉 당시 거주지의 유구다. 그곳에 있는 햇볕에 말린 벽돌로 쌓은 큰 벽을 조사하면 벽돌이 비에 녹은 흔적이 보인다고 한다.
출토된 동물 뼈도 단서가 된다. 사람들은 양, 염소, 소 같은 질 좋은 고기를 먹었고 돼지도 조금 먹었다. 생선도 대량으로 먹었다. 게다가 지금이라면 동아프리카에서나 볼 수 있는 가젤이나 하테비스트의 뼈도 나왔다. 이런 점에서 가와에는 당시 기자 주변이 사바나에 가까운 환경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대피라미드 내부를 걷다
이어서 가와에는 관광객으로 대피라미드에 들어갈 때의 경로를 따라 내부를 설명한다. 정식 입구는 현재 닫혀 있다. 관광객은 9세기경 아랍의 지배자 알마문이 도굴을 위해 뚫었다고 알려진 구멍으로 들어간다. 그 구멍을 따라가면 상승 통로가 나온다. 상승 통로와 만나는 지점 부근에는 아래로 향하는 하강 통로도 이어져 있다.
하강 통로는 매우 좁아서, 가와에의 말로는 "벌칙 게임처럼" 계속 쪼그려 앉은 채로 나아가야 한다. 지표에서 30m가량 내려가면 지하 방에 도착한다. 미완성 방인데, 왜 미완성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명계를 나타낸다는 설, 그곳에서 위쪽으로 다른 방을 만들려 했다는 설 등이 있지만, 막다른 곳이고 아무것도 없다. 하강 통로는 다른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상승 통로까지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상승 통로도 쪼그려 앉아 올라간다. 한동안 가면 피라미드 내부에서 가장 큰 공간인 대회랑이 나온다. 천장 높이는 약 8.7m, 가와에의 표현으로는 대략 9m이며, 내쌓기 방식으로 천장이 조금씩 좁아진다. 처음 들어가는 사람에게는 신비롭게 느껴질지도 모른다고 한다. 대회랑을 더 올라간 안쪽에 마지막 방인 왕의 방이 있다. 왕의 방만은 돌의 재질이 달라서 방 전체가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조금 어두운 분위기라고 한다.
대회랑 앞에서 수평으로 나아가면 통칭 '왕비의 방'이 있다. 다만 실제로 왕비가 매장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왕의 방이 어둡고 붉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는 데 비해 이 방은 흰 석회암으로 지어졌다. 그래서 여성적이라고 여겨져 현대에 들어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고 가와에는 설명한다.
왕의 방 위에는 '하중 분산의 방'이라고 불리는 5층의 방이 있다. 특별한 허가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맨 위는 맞배식 삼각형으로 되어 있어 위에서 가해지는 무게를 분산하는 역할을 한다. 진행자가 "고대 기술로 생각하면 복잡하네요"라고 하자 가와에는 "엄청나게 복잡하죠"라고 답했다. 이렇게 거대하고 복잡한 구조를 지하가 아니라 피라미드 내부에 만든 것은 쿠푸만의 특징이라고 한다.
왜 지어졌는가: 왕묘이자 세계관의 표현
피라미드의 목적에 대한 가와에의 답은 기본적으로 '왕의 무덤'이다. 피라미드에는 미라도 보물도 없다는 말이 자주 나오지만, 그것은 쿠푸왕의 피라미드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멤피스 지구에서는 70기 이상의 피라미드가 발견되었지만, 왕의 미라가 온전한 형태로 발견된 예는 없다. 고대 이집트의 왕묘는 거의 모두 도굴되었기 때문이라고 가와에는 말한다.
한편 다른 피라미드에서는 미라의 파편이나, 꺼낸 내장을 담는 카노푸스 단지의 일부가 발견되었다. 기자의 3대 피라미드에도 석관이 있고 카노푸스 단지를 넣는 자리도 있다. 이런 점에서 왕묘라는 것은 "거의 틀림없다"고 가와에는 말한다. 다만 피라미드는 단순히 왕을 묻는 장소가 아니었다. 태양 신앙, 명계의 신 오시리스, 세계가 탄생했다고 여겨지는 원초의 언덕 등과 결부된, 우주 창생을 비롯한 그들의 세계관과 밀접하게 관련된 건조물이기도 했다고 한다.
왜 거대해졌는가: 국가의 성립과 부의 집중
왕묘가 왜 이토록 거대해졌을까. 가와에는 더 큰 시각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피라미드가 지어지기 약 500년 전, 이집트에 처음으로 국가가 성립했다. 현대인에게는 나라가 있는 것이 당연하지만, 처음에는 나라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내레이션의 설명에 따르면, 국가가 성립하자 행정과 세금 제도가 갖춰지고 나라 곳곳에서 거둔 부가 중앙에 모이게 되었다. 그 부를 어떻게 쓸지 생각했을 때, 그들은 왕의 무덤을 짓기로 했다. 가와에는 국가 성립 후 500년 남짓한 기간에 왕묘가 점점 거대해진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건설자는 노예였는가: 피라미드 타운의 식생활
예전에는 피라미드를 지은 것이 노예라고 했다. 가와에에 따르면 이 설의 출발점은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있다. 가와에가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그 설이 널리 이야기되었고, 할리우드 영화에도 채찍을 맞는 노예가 피라미드를 짓는 장면이 그려졌다.
그러나 가와에의 스승인 마크 레너가 대장을 맡은 피라미드 타운 발굴 조사에서는 그런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드러난 것은 소비 규모가 매우 큰 사회였다. 빵을 굽는 큰 항아리를 바탕으로 빵 하나의 크기를 계산하는 실험을 했더니, 약 9500킬로칼로리라는 초고열량 빵이 나왔다. 이것이 나흘에 한 번꼴로 배급되었다고 가와에는 보고 있다. 양과 염소의 뼈도 대량으로 나와,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은 고기를 먹었다는 계산이 된다. 가와에는 이것이 고대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나일강에서 잡히는 메기와 틸라피아도 대량으로 먹었다. 게다가 나일아카시아를 고형 연료로 활발히 태운 흔적도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건설자들이 꽤 좋은 생활을 하면서 피라미드를 세웠다고 추측할 수 있다고 한다.
다만 가와에는 단서도 단다. 중앙집권 국가 안에서 왕의 권력은 절대적이었고, 그 권력 아래 사람들이 동원되었다는 것은 틀림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채찍을 맞는 노예의 이미지와는 다르다는 것이 가와에의 견해다.
몇 명이 지었는가
고대의 인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한 가지 방법은 식량 공급량으로부터 역산하는 것이다. 매우 대략적인 추정이지만, 고왕국 시대의 인구는 100만에서 300만 명 정도였다고 가와에는 소개한다.
대피라미드 건조에 참여한 인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한 추정에서는 2만에서 3만 명 정도로 본다. 다만 모두가 현장에서 돌을 쌓았던 것은 아니다. 현장에서 작업할 수 있는 면적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그 점에서 생각하면 실제로 피라미드 작업을 맡은 것은 4000명 정도가 아니었을까 하고 가와에는 본다. 그 밖의 사람들은 식량 공급이나 물자 운반 등으로 관여했을 것이라고 한다.
돌을 캐내고, 옮기고, 앉히다
내레이션에 따르면 건설은 먼저 부지 선정에서 시작되었다. 기자는 사막의 모래땅이 아니라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대지다. 고대 이집트인은 이 대지를 토대의 일부로 이용했고, 별과 태양의 관측을 통해 각 변이 거의 정확히 동서남북을 향하도록 방위를 정했다고 여겨진다.
채석장은 피라미드 바로 옆에 있다. 기자 대지에서 질 좋은 돌이 나온다는 점이 이곳이 선택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라고 가와에는 말한다. 돌을 자를 때는 섬록암 같은 단단한 화성암으로 만든 돌망치를 써서 사람의 힘으로 끈질기게 두드려 깎았다. 계속 두드리면 망치 자체도 깎여서 둥글어진다. 각도를 바꿔 가며 계속 쓰다가 마지막에 완전히 동그래져서 쓸 수 없게 되면 버린다. 그렇게 버려진 망치를 4500년 뒤에 고고학자가 발견하기도 한다고 한다.
어느 정도 모양을 다듬은 돌은 현장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다시 가공하거나, 모양이 갖춰져 있으면 그대로 앉혔다. 큰 돌은 아마 썰매에 실어 옮겼을 것이다. 피라미드 내부에는 기자에서 수백 km 남쪽, 이집트 남부 국경 가까이에 있는 아스완에서 옮겨 온 60~70톤의 거대한 화강암도 있다. 이런 것은 썰매로 옮겼을 것이라고 가와에는 생각한다. 썰매로 옮기는 모습의 기록도 실제로 남아 있다고 한다.
돌을 앉힐 때는 밧줄을 썼지만, 너무 무거우면 밧줄만으로는 움직일 수 없다. 그래서 돌에 홈을 내고 지렛대 원리로 밀어서 앉혔다. 그래도 힘들기 때문에 아래에 모르타르를 깔아 잘 미끄러지게 했다. 모르타르는 굳으면 접착제 같은 역할도 한다.
방을 만드는 방식에도 특징이 있다. 피라미드의 방은 기본적으로 지하에 있으며, 암반을 파내서 만든다. 그러나 대피라미드와, 그 전에 쿠푸의 아버지 스네프루가 지은 붉은 피라미드와 굴절 피라미드만은 방이 지면보다 위에 있다. 그래서 파낸 것이 아니라 피라미드를 쌓아 올리면서 동시에 공간도 만들어 나갔다고 가와에는 설명한다.
쌓아 올린 방법: 경사로는 어디에 있었나
돌을 높이 쌓아 올린 방법에 대해서는 지금도 여러 가설이 있다. 그중에서 가와에는 경사로가 "거의 틀림없다"고 답한다. 경사로는 고대 이집트에서 수천 년에 걸쳐 계속 쓰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의견이 갈리는 것은 경사로의 형태다.
가와에가 현재 발굴하고 있는 것은 아비도스 남쪽 신키에 있는 피라미드다. 쿠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 시대의 것으로, '신키'는 지명이며 '신규(新規)'라는 뜻이 아니라고 가와에는 덧붙인다. 이 피라미드에는 네 면 각각에 경사로가 남아 있어, 사방에서 돌을 옮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대피라미드에 대해 가와에는 고고학자가 중시하는 '콘텍스트', 즉 주변 상황에서 생각한다. 대피라미드는 기자 대지의 북쪽 끝에 서 있고, 북쪽은 바로 절벽이라 경사로를 만들 수 없다. 동쪽과 서쪽에는 피라미드 건조 몇 년 뒤부터 왕족과 귀족이 마스타바 무덤을 짓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면 경사로를 둘 수 있는 곳은 남쪽밖에 없다. 게다가 남쪽에는 거대한 채석장이 남아 있다. 이를 근거로 가와에는 어느 높이까지는 남쪽에서 직선 경사로로 쌓고, 그 뒤로는 피라미드 바깥쪽에 나선형 경사로를 만들어 나간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경우 마지막 경사로의 각도는 20도 가까이 되어 너무 가파르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가와에에 따르면 같은 시대의 다른 경사로를 조사해 보면 비슷한 각도의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 따라서 20도는 불가능한 각도가 아니며, 무게도 2~3톤 정도의 돌이라면 문제없이 옮길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몇 분에 1개'라는 계산은 성립하지 않는다
내레이션은 대피라미드에 평균 약 2.5톤의 돌이 230만~300만 개 쓰였다고 알려져 있다고 소개한다. 다만 돌의 크기나 내부의 밀도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수치는 모두 추계다. 이 개수를 추정 건조 기간인 약 20년으로 나눠 하나씩 차례로 쌓았다고 하면 몇 분에 1개라는 속도가 된다.
가와에는 이 계산을 물리친다. 하나씩 쌓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돌이 한꺼번에 운반되어 오면 10개를 한 번에 쌓았을 수도 있고, 그 자리에서 가공하면서 차례차례 쌓아 나간다. 이런 계산은 숫자의 마술이나 트릭처럼 되어 버린다고 가와에는 말한다. 개수 자체도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실험 고고학자의 계산으로도 사람의 힘으로 건조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수치라고 한다.
가와에가 오히려 알고 싶은 것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은 조직력과 사람을 움직이는 방식이다. 실험 고고학에서도 여럿이 밧줄을 당기면 힘이 분산되어 한꺼번에 당기기가 어렵다고 한다. 고대 사람들은 그것을 해냈다. 가와에는 또 하나의 예로 약 100년 전의 기록을 든다. 이집트 최대의 신전인 카르나크의 아문 신전을 복원할 때, 당시 사람들은 떨어져 있던 수십 톤의 돌을 중장비 없이 옮겼다. 그 모습을 찍은 흑백 사진이 남아 있는데, 제대로 옮기고 있다. 이를 통해 가와에는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방법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노래다. '영차' 같은 구령은 지금도 흔히 쓰이며, 그런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라고 가와에는 말한다.
현대에 대피라미드를 지을 수 있을까
고대의 기술이 현대보다 높았느냐는 질문에 가와에는 "아니다"라고 답한다. 기술적으로는 지금이 더 앞서 있다. 현대에 국가 차원에서 지을 수 없다면, 그것은 사회적·정치적으로 큰 문제가 되기 때문이라고 가와에는 본다.
실제 시산으로 가와에가 소개하는 것은 1978년경 오바야시구미가 사내지 『계간 오바야시』에서 한 견적이다. 그에 따르면 당시 가격으로 1250억 엔, 공사 기간 5년 정도면 지을 수 있다고 했다. 현대라면 지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가와에는 말한다. 다만 그것을 당시의 기술로 이뤄 낸 노력과 시간은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가와에는 쿠푸왕의 석관을 예로 든다. 지금은 묘석에도 화강암이 흔히 쓰이지만, 당시의 화강암은 왕만의 것이었다. 쿠푸의 관은 화강암 덩어리를 파내서 만들어졌다. 지금이라면 인공 다이아몬드 공구로 쉽게 파낼 수 있지만, 4500년 전은 인공 다이아몬드는커녕 철도 청동도 일반적이지 않은 구리의 시대였다. 어떻게 파냈느냐는 질문에 가와에는 "기합과 근성이죠"라고 답했다. 실험 고고학에 따르면 구리 공구로 화강암을 파내는 데는 2만 8000시간이 걸린다. 몇 개 팀으로 나눠 작업했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관 하나에 아마 9년에서 10년 가까이 걸렸다는 계산이 되어 시간 감각이 완전히 다르다고 가와에는 말한다.
내레이션은 이를 보충한다. 구리로는 화강암을 직접 깎을 수 없기 때문에 고대 이집트인은 석영이 섞인 모래를 연마제로 쓰고, 모래를 뿌려 가며 구리 드릴을 움직여 조금씩 깎았다. 쿠푸왕의 석관에도 드릴이나 원통형 공구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가공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뮤온이 찾아낸 미지의 공간
대피라미드에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주요 공간은 오랫동안 지하 방, 왕비의 방, 왕의 방 세 곳이었다. 다른 방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는 예전부터 있었지만 이야기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를 과학적으로 찾아낸 것이 나고야 대학을 포함한 일본·프랑스·이집트의 국제 조사팀 '스캔피라미드'다.
내레이션에 따르면 이 팀은 2017년, 뮤온을 이용한 투시 조사로 대피라미드 내부에서 미지의 공간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뮤온은 우주선이 대기 중의 원자와 충돌해 생겨나 지상으로 쏟아지는 소립자다. 두꺼운 돌도 통과하지만, 물질이 두껍고 밀도가 높을수록 수가 줄어든다. 그래서 피라미드 내부에 검출기를 두고 날아오는 뮤온의 수와 방향을 측정했다. 그 결과 기존의 구조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뮤온이 통과하는 영역이 확인되었다. 북쪽 입구 부근에서도 2016년에 같은 조사로 별개의 공간이 발견되었고, 2023년에는 내시경으로 내부를 촬영하는 데도 성공했다.
가와에의 설명으로는 대회랑 위에 대회랑과 비슷한 30m급 공간이 있으며, 팀은 이를 '빅 보이드'라고 부른다. 입구 부근에서 발견된 통로 형태의 공간은 '노스페이스 코리더'라고 불리며, 촬영에 성공한 것은 이쪽이다. 반면 빅 보이드는 피라미드의 중심부에 있어 물리적으로 접근할 수 없고, 현재로서는 뮤온 데이터가 그 존재를 시사하는 데 그친다. 돌 하나만 빼면 닿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드릴로 구멍을 얼마나 뚫어야 하느냐는 이야기가 된다. 애초에 피라미드는 문화재이므로 훼손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빅 보이드를 직접 확인하기는 어렵다고 가와에는 본다.
빅 보이드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가와에는 추측한다
빅 보이드의 내용물에 대해 가와에는 "안이 궁금하긴 하지만"이라고 전제한 뒤, 무언가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대피라미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왕의 방이다. 왕의 방을 만드는 과정에서 지상 명령은 피라미드도 통로도 무너지지 않게 하여 그곳에 왕의 시신을 매장하는 것이었다. 빅 보이드는 그것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 즉 통로와 공간을 지키기 위한 구조라고 가와에는 추측하며,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또 다른 미지의 공간은 있을까. 가와에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답하면서도 "다만 빅 보이드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라고 덧붙였다. 북쪽에 다른 통로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견해는 예전부터 있었다. 다만 가와에 등이 상정했던 것은 맞배 형태의 큰 구조체 아래였다. 실제로는 그 뒤쪽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공간에 의미가 있다는 것은 가와에 등의 3차원 측량 조사에서도 시사되고 있다. 그래도 가와에는 더 이상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작네'에서 시작된 가와에의 이집트
가와에는 대피라미드에 1000번 이상은 가 봤다고 한다. 그러나 열아홉 살에 처음 찾았을 때 처음 든 인상은 "조그맣네"였다. "이 정도인가", "아무것도 없네"라고 느낀 데다 물건 파는 사람들이 끈질겼다. 낙타 몰이꾼이 이상한 일본어로 "전부 원 달러"라며 다가와 진저리가 났다고 한다.
가와에가 이집트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중고등학생 때 본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계기였다. 프랑스의 질 도르미옹 등이 대피라미드 내부에 미지의 공간이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수평 통로 너머에 드릴로 구멍을 뚫었다. 이는 문제가 되기도 했다. 구멍에서는 모래가 나왔고 공간을 발견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그 뒤 일본의 요시무라 선생이 전자파를 이용한 탐사로 공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보여 주었고, 그것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대학 입시에 실패한 뒤, 자신이 배우고 싶은 것은 이집트라고 생각해 현지로 건너갔다.
내레이션에 따르면 가와에는 그 뒤 약 16년간 이집트에서 살았다. 4년간 가이드로 일한 뒤 장학금을 받아 카이로 아메리칸 대학에 진학해 이집트 고고학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지식이 깊어지면서 피라미드가 보이는 방식도 달라졌다. 유적은 사전 지식 없이 첫인상을 맛봐야 한다는 생각도 있다. 그러나 가와에는 지식을 갖고 가는 편이 압도적으로 더 즐길 수 있다는 '파'라고 말한다. 왕가의 계곡이라면 벽화의 색이 남아 있어 놀랄 수 있지만, 대피라미드의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왕의 관으로서 처음으로 화강암을 파내 만든 석관이 있고, 방 전체가 처음으로 화강암으로 지어진 공간이 있다. 관 하나에 9년이 걸렸다고 생각하면 대단하다고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지금은 피라미드가 정말 크게 느껴진다고 가와에는 말한다.
피라미드 뒤에 있는 '인간의 시스템'
내레이션은 인류가 4500년 동안 줄곧 피라미드에 매료되어 온 것은 아니라고도 말한다. 오랜 세월 동안 피라미드는 잊혔고, 건축 자재로 돌을 가져간 시대도 있었다. 세계적인 관심이 다시 높아진 것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이후 고고학이 발전한 최근 200년 남짓의 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현대인에게 대피라미드란 무엇일까. 가와에는 시간의 스케일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현대인은 몇 년은커녕 몇 달, 며칠 같은 짧은 단위로 사물을 보기 쉽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보면 4500년 전에 생겨난 나라라는 개념, 행정이라는 개념, 세금이라는 개념은 지금도 쓰이고 있다. 그것들은 어쩌면 4500년 뒤에도 변하지 않을지 모른다. 한편 석조 거대 건조물을 짓는 일처럼 이미 사라진 것도 있다.
무엇이 고대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 피라미드를 볼 때, 사람들은 자꾸 신비로움이나 돌의 크기에 눈을 빼앗긴다. 그러나 가와에가 봐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비하인드 더 스크린', 즉 그 뒤에 있는 인간 활동의 시스템이다. 그것은 인간 문명의 근간에 관련된 것이며, 아마 4500년 뒤에도 남을 것이다. 그것을 배움으로써 인간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가와에는 말한다.
되풀이되는 흥망의 사이클
대피라미드를 낳은 강대한 중앙집권 국가도 영원히 이어지지는 않았다. 가와에는 "인간은 역시, 안 변해요"라고 말한다. 관료가 점차 힘을 갖게 되고, 힘을 가진 관료는 부패한다. 그 사이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역사에서 배우라는 말을 흔히 하지만, 답은 이미 나와 있다. 피라미드 시대로 말하자면, 자연재해의 영향도 있는 가운데 중앙집권 체제가 무너지고, 거기서 다시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 문명은 이 사이클을 되풀이해 왔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라고 가와에는 말한다. 인간의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 다른 형태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해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 내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권력을 집중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나올 것이다. 다만 사회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 속에서 이루어지므로 간단하지 않다고 가와에는 이야기를 맺었다. 프로그램은 마지막으로 왕조가 멸망해도 대피라미드는 남았다고 돌아보며, 문명이 번영하고 쇠퇴하고 다시 새로운 사회가 탄생하는 흥망성쇠는 인류에게 피할 수 없는 숙명인가 하는 물음을 남기고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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